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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넘어 세상
5월19일 베트남 호치민(Hồ Chí Minh/胡志明) 탄생일 본문
이번달 5월 19일이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태어난 날로 베트남에서는 최대 국경일 중 하나입니다.
호치민은 누구일까요?
사실 호치민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호치민의 본명은 응우옌 닷 탕(Nguyễn Tất Thành)이며, 1890년 5월 19일에 응에안성 호앙쭈(Nghệ An, Hoàng Trù)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호치민의 아버지는 후에(Huế)에서 관직에 올랐지만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관직을 그만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호치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가난을 해결하고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프랑스 6000톤급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후 1914년부터 1919년까지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 견습공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이때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였습니다.
1919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파리로 돌아와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阮愛國)'이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합니다. 당시 파리는 세계 식민지국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국가와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갔습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참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네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여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당원이 됩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LE PARIA)'를 편집,발행하면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4년 모스크바의 제5차 코민테른회의에 참석하여 동방부(東方部)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코민테른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본격적인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히게 됩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 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태국으로 파견되어 베트남 주변국에서 인도차이나 혁명운동을 이어갔고, 1930년 코민테른에 권한을 받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당하면서 이때부터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후 중국에 근거지를 두고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여 베트남인혁명동지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하지만 1931년 홍콩의 영국경찰에게 체포되어 2년간 복역을 하게되고 1933년 석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가 독립임시정부을 설립하기 위한 비밀작업에 들어갑니다. 1939년 제2차 세계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에 중국 쿤밍으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되고, 독일의 프랑스를 침공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점차 악회되면서, 이때를 노린 일본이 인도차이나 지배를 이어가게 됩니다. 1941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베트맹', '베트남독립동맹회')가 결성하게 되고, 이때부터 이름을 호치민으로 사용하게됩니다.
2차 대전이 중반에 이르면서 일본의 전세가 기울어지자 독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으나, 1942년 중국 중경을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 국민당에 체포되어 수감됩니다. 1943년 무협의로 석방되어 곧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게 됩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호치치민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었고,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치민은 정부 주석으로 취임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까지 약 8년간의 독립전쟁이 진행되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완전 독립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고, 이때부터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쌓이면서 곧이어 베트남 전쟁이 시작됩니다. 호치민은 독립은 이뤄냈지만 통일은 보지 못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인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주석 재임 중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호치민이 사망한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은 3년간 지속됩니다.
'호치민(Hồ Chí Minh/胡志明)'이란 이름은 독립운동 시절에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총 160개의 필명과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마직막에 사용한 이름입니다.
☆호치민평전의 내용중☆
* 호치민의 삶은 반은 레닌, 반은 간디였다.
*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땀(함께 일한다). 3꿍의 정신으로 베트남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독립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하였다.
* 외신기자들이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의 물음에 '나를 이끄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이다. 나는 민족주의자이며, 나는 다만 공산주의를 지금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줄 비상구 중 하나로 택할뿐이오.'
* 1952년 호치민과 스탈린 두 정상이 회담을 열었는데,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개를 가르키며 호치민에게 물었다.
스탈린 ;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호치민 ;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소.
* 1946년 9월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중, 호치민은 프랑스 장 생트니 소령과 회담에서 '우리가 당신네 한 사람을 죽이는 동안 당신들은 우리를 열사람 죽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땅에서 먼저 없어지는 것은 당신들이 될 것이요.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요.
*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것이다.'
*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식민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베트남전쟁중 외신들의 질문에 '강물은 둘로 나눌 수 없다. 우리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하나의 베트남을 원할 뿐이다.'
* 어려운 것이란 없다.산을 파서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그리고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 가게 하고,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 호치민 주석 사망당시 외신기자로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찌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기사 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 호치민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고 좋아했다 한다.
*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수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물 라디오 한 대, 탁상 시계와 책 몇권이 있는 게 전부다.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1식3찬 만을 하며 살았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
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을 국부로 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있는나라. 바로 베트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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