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넘어 세상

독립운동가들의 교류 ; 베트남과 대한민국 본문

재미있는 베트남여행

독립운동가들의 교류 ; 베트남과 대한민국

담쟁이가이드 2023. 7. 8. 14:00
728x90
반응형

1920년을 전후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이 약소국의 설움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나눈 내용이 프랑스 정부자료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이 1919~1920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프랑스에 체류하던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어 있다. 호치민은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과 뉴욕등지에서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1919년 파리에 정착하고 애국이란 뜻의 이름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 阮)"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평화회의가 열리던 프랑스 파리에는 당시 식민지국들에서 건너 온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 1890-1969)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평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을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파리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으며, 베트남의 호치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보고서 내용에는 호치민은 일제에 저항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펴낸 간행물들을 살표보며 호치민도 간행물을 창간하려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호치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자신의 독립운동의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호치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한 것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는데, "한국인 황씨는 호치민과 아주 친밀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대화했다." 여기에 기록된 황씨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黃玘煥,1886~1923)"이다. 호치민은 심지어 자신을 감시하는 경찰관 "장(Jean)"을 황기환에게 소개해 주는 대범함까지 보였다고 한다.
 

황기환(黃玘煥,1886~1923) - 1995 / 건국훈장 애국장

 
"장(Jean)"의 기록물에는 "호치민은 나를 한국인 대표부 서기장 황씨는 소개해 줬다. 우리는 러시아, 스웨덴을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한국인과 대화를 하였는데, 이사람은 영어도 불어도 잘 못해서 더 정보를 얻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한국인 독립운가는 "윤해(尹海,1888-1939)"로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회의가 끝난 9월에야 도착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윤해(尹海,1888-1939) - 1990 건국훈장 독립장

 

황기환이 프랑스 학계, 정계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귀중한 순간도 기록되어 있다. 1920년 1월 8일 저녁, 파리의 지식인들이 모인 생제르맹의 모처에서 열란 프랑스 지리학회 모임에서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라는 제목으로 연설자로 나섰다. 프랑스 국회의원, 교수, 그리고 중국, 베트남인들은 물론 일본인들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독립을 이룰때까지 일본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대한민국과 일본을 잘 아는 중국인 노동자회 사무청장과 펠리시앙 샬레 교수에게 연설을 넘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기환의 뒤를 이어 연설한 프랑스 대학교수 "펠리시앙 샬레"의 발언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에 대해 미리 준비한 영상까지 보여주며 일본을 규탄한 것이다."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 연설에는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억압 속에 있다."라고 표현하며, 3.1운동은 여성들도 제 몫을 다한 운동으로 그 열기에 찬사를 보냈으며,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강간하고 처형하는 사례를 인용하여 일본의 잔혹암을 증언하는 영상도 상영하였다. 그는 "한국의 유구한 문명은 일본에겐 교사였다. 2천만 한국인은 일본에 자결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라고 덧붙였다.

 
(우측)펠리시앙 샬레(Felicien Challaye)

 
황기환과 함께 학회에 참석한 호치민은 연설을 거부당하였고, "베트남사람들도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간단히 할테니 연설을 허락해 달라. 라고 요청하였지만 학회장이었던 소르본대 교수는 이를 거절하였다.

경찰 "장(Jean)"은 이때 쓴 보고서에서 베트남의 호치민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의 동지적 협력관계에 주목하였다는데, "호치민은 파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요구하고자 파리평화회의의 대표로 온 사람들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통신국을 열었다. 한국인들은 호치민이 이 통신국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였고, 그의 저작과 홍보물을 한국 학생들이 미국에서 출판한 한국평론 등도 파리에 유포했다."라고 기록하였다.

호치민은 임시정부 외무총장이자 파리위원부 대표였던 김규식(金奎植,1881-1950)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호치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도 프랑스 자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장(Jean)"의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치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되어 중국에서 간행되었는데, 무두 호치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김규식(金奎植,1881-1950)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김규식은 중국신문의 미국특파원을 호치민에게 연결하여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하였으며, 당시 호치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침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호치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압제에 독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 대한민국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프랑스 일간지 르포퓔레(하노이 호치민박물관 2층에 전시)는 1919년 "인도차이나와 대한민국"이라는 글을 두고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728x90
반응형